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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bola-find 2025. 3. 28.

그 시절



그 여름, 시간은 멈춘 듯했다. 우리가 몰랐던 건, 실제로는 모든 것이 가장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창밖으로 흐르는 뜨거운 공기는 도시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김재형은 낡은 책상 앞에 앉아 이력서를 다시 쳐다보았다. 네 번째 수정본이었다. 아니, 아마도 열 번째일 것이다. 검은색 볼펜으로 수없이 지우고 고치면서 종이는 구겨지고 찢어진 곳곳에 절망이 배어들었다.

"또 떨어졌네."

어머니의 목소리가 부엌에서 들려왔다. 신문 지면에 실린 구직 광고를 오려두신 스크랩북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다. 빨간 볼펜으로 이미 십여 개의 지원 기업에 X 표시가 되어 있었다.

취업난은 그의 세대를 옭아매는 쇠사슬 같았다. IMF 외환위기 이후 대학을 졸업한 그의 동기들은 하나같이 불안한 미래와 싸우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해외로 떠났고, 어떤 이들은 공시생의 길을 택했으며, 또 다른 이들은 그저 집에 머물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책상 구석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박동혁'이라는 이름이 번쩍였다.

"야, 재형아."

박동혁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랬듯 힘있고 활기찼다.

"응, 동혁아."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당연하지. 요즘 시간밖에 없어."

그의 말에 둘 다 쓰디쓴 웃음을 내뱉었다. 실업의 쓴맛은 그들의 입가에 배어 있었다.

창밖으로 흐르는 햇살이 책상 위 이력서를 비추었다. 새로 지운 흔적들, 고쳐 쓴 문장들, 그리고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빈칸들. 그 모든 것들이 그의 불안과 희망을 증명하고 있었다.



저녁 무렵, 홍대 인근의 작은 술집. 창문가 구석진 자리에 김재형과 박동혁이 마주 앉았다. 맥주잔은 이미 두 번째를 채우고 있었다.

"요즘 회사 분위기가 어때?" 김재형이 물었다.

박동혁은 잠시 말없이 맥주잔을 굴렸다. "구조조정 얘기가 계속 돌아. 언제 자를지 모르는 분위기야."

IMF 이후 모든 것이 불안정해졌다. 안정적이라 믿었던 직장도, 미래에 대한 꿈도 한순간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했는데." 김재형의 말투에는 쓴웃음이 묻어있었다.

그때 문 앞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이수연이었다.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그녀는 언제나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박동혁이 손을 흔들었다.

"이리 와봐, 수연아."

이수연은 그들 앞에 앉으며 맥주를 권했다. "오늘 또 면접?"

김재형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떨어졌어."

"그래도 포기하진 마." 이수연의 목소리에는 따뜻함이 묻어있었다. "우리 세대는 달라. 예전처럼 정해진 길을 가는 게 아니잖아."

박동혁이 말을 보탰다. "IMF 이후로 모든 게 바뀌었어. 예전 같은 안정은 없어. 대신 새로운 기회들이 생기고 있지."

창밖으로 해질녘 도시의 풍경이 펼쳐졌다. 네온사인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고, 거리는 점점 밝아졌다. 그 빛들처럼 그들의 미래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밤은 천천히 그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김재형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번호는 낯선 번호였다.

"김재형 님?"

"네, 말씀하세요."

"저는 디자인 스튜디오 '크리에이티브 랩' 대표 최진수입니다. 이수연 디자이너를 통해 당신을 알게 됐습니다."

김재형은 잠시 말을 잃었다. 이수연이 자신을 추천했다니.

"저희 회사에서 마케팅 기획 직원을 뽑고 있습니다. 면접 한 번 보러 오시겠습니까?"

세 번의 심호흡 끝에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창밖을 보니 아침 햇살이 따스했다. 불확실성은 때로는 기회의 문이 될 수 있다는 걸 또다시 느꼈다.

오후, 이수연에게 연락했다.

"고마워, 추천해줘서."

"아직 면접도 보지 않았잖아."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넌 할 수 있을 거야."

그 순간 김재형은 알았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서로를 믿고 지지하는 관계 속에서 희망은 자라난다는 것을.


 

면접 당일, 김재형은 긴장했다. '크리에이티브 랩' 사무실은 홍대 인근의 오래된 건물 3층에 있었다. 벽에는 다양한 포스터와 디자인 작업물들이 걸려 있었다. 컬러 팔레트, 그리드 시스템, 타이포그래피 샘플들이 전문성을 자랑했다.

최진수 대표는 그의 포트폴리오를 천천히 넘기며 날카로운 눈으로 분석했다. UI/UX 기획서, 브랜딩 전략 문서, 크리에이티브 무드보드들이 펼쳐졌다.

"우리 회사는 밀레니얼 세대를 타겟으로 하는 브랜드 에이전시입니다. 당신의 비주얼 컨셉과 마케팅 인사이트를 들려주세요."

김재형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단순한 로고나 컬러 팔레트 이상입니다. 그것은 고객과 소통하는 언어이자 감성입니다. 저는 미니멀리즘과 감성적 스토리텔링을 결합한 브랜딩 접근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최진수 대표는 그의 레이아웃 포트폴리오를 유심히 살폈다. 네거티브 스페이스 활용, 그리드 시스템의 섬세한 균형, 타이포그래피의 조화로운 구성이 돋보였다.

"당신의 포트폴리오는 밀레니얼 세대의 감성을 잘 이해하고 있군요. 비주얼 내러티브 구축 능력이 뛰어납니다."

면접은 기술적 대화와 창의적 철학의 교차점에서 진행됐다. 김재형은 브랜드 스토리텔링, 비주얼 컨셉, 사용자 경험 디자인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

해질 무렵, 최진수는 그에게 제안했다. "우리 회사와 함께 일해보지 않겠나?"

김재형의 삶은 한 순간에 바뀌었다. 불확실성은 두려움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문이었다.


새로운 직장에서의 첫 주간, 김재형은 모든 것이 낯설고 흥분됐다. 이수연도 같은 건물의 프리랜서 사무공간에서 일하고 있어 더욱 특별했다.

점심시간, 그들은 옥상에 올라갔다. 서울의 도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요즘 어때?" 이수연이 물었다.

"이상해. 내가 원하던 게 이거였나 싶으면서도, 동시에 이게 맞다는 걸 느껴."

이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세대는 그런 거야. 확신과 불안 사이를 항상 오가니까."

도시의 빌딩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IMF의 상처를 입은 도시는 여전히 재건 중이었고,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김재형이 묻듯이 말했다.

"아무도 모르지." 이수연의 대답은 명확했다. "하지만 함께라면 괜찮을 거야."

해는 점점 저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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