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옥상정원
도시의 회색빛 아파트 숲 사이, 나의 작은 옥상정원은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봄이면 수줍게 피어나는 꽃들이, 여름이면 짙은 녹음이,가을이면 붉게 물든 단풍이, 겨울이면 조용히 내리는 눈이 정원을 채웠다. 그곳은 단순한 공간이 아닌, 나의 영혼이 숨 쉬는 곳이었다. 정원을 처음 시작한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였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나에게 친구가 작은 화분 하나를 선물했다.
"이건 살아있는 것이야.
네가 돌봐줘야 해."
그 말이 내 마음 깊은 곳에 박혔다. 살아있는 것. 나도 살아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서툴렀다. 물을 너무 많이 주어 뿌리가 썩기도 했고, 햇빛이 필요한 식물을 그늘에 두기도 했다.
하지만 실패할 때마다 배웠고, 그 과정에서 나 자신도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옥상정원이 커질수록 나의 상처도 조금씩 아물어갔다. 매일 아침 정원에서 맞이하는 해는 새로운 시작을 알려주었고,
저녁의 노을은 하루의 끝을 평화롭게 맺어주었다.
계절이 바뀌며 정원은 끊임없이 변화했고, 나도 그 변화와 함께 성장했다.
어느 날, 옆 건물에 사는 작은 소녀가 나의 정원을 발견했다. 그녀의 이름은 혜정이었다. 혜정이는 매일 창문으로 내 정원을 바라보다가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찾아왔다.
"아저씨, 정원이 너무 예뻐요. 저도 식물을 키워볼 수 있을까요?"
그 순간, 나는 오랜만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혜정이에게 작은 화분과 씨앗을 주었고, 그녀에게 식물을 돌보는 법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혜정아, 식물은 우리와 같아. 관심과 사랑이 필요해. 그리고 때로는 혼자 있을 시간도 필요하지."
혜정이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마치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어머니도 항상 나에게 같은 말을 했었다.
세월이 흘러 혜정이는 청소년이 되었고, 나의 정원은 더욱 풍성해졌다. 혜정이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정원에서 나에게 이야기했고,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놓친 세상의 변화를 느꼈다.
"아저씨, 왜 정원을 시작하셨어요?"
문득 혜정이가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무언가를 돌보고 싶어서였을 거야. 내가 돌보지 못했던 것들을 위해서."
혜정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가 말하지 않은 것까지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혜정이의 가족이 이사를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혜정이는 눈물을 흘리며 내 정원을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아저씨, 제가 없어도 정원을 계속 가꾸실 거죠?"
나는 혜정이의 손을 꼭 잡았다.
"물론이지. 그리고 네가 어디에 있든, 네 마음속에도 항상 정원이 있을 거야."
혜정이는 떠났지만, 그녀가 심었던 식물들은 계속해서 자라났다. 나는 그 식물들을 보며 혜정이를 생각했고,어디에서든 행복하기를 바랐다.
계절은 계속 변화했고, 나의 머리카락은 점점 하얗게 변해갔다. 하지만 정원은 여전히 생명력으로 가득했다.
어느 날, 나는 정원 의자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떠난 후에도 이 정원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그때, 문득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한 젊은 여성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저 혜정이에요."
나는 놀라움에 말을 잃었다. 혜정이는 이제 성인이 되어 있었고, 그녀의 옆에는 작은 소녀가 서 있었다.
"이 아이는 제 딸 서연이에요. 서연아, 이 분이 내가 항상 이야기했던 정원 아저씨야."
서연은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엄마가 항상 아저씨 정원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저도 커서 정원을 가꾸고 싶어요."
그 순간,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흘러도 정원은 계속해서 새로운 생명과 인연을 이어주고 있었다.
"혜정아, 네가 정말 보고 싶었어."
"저도요, 아저씨. 제가 힘들 때마다 아저씨가 가르쳐주신 것들을 생각했어요. 식물을 돌보는 법,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 자신을 돌보는 것과 연결되는지..."
우리는 정원에 앉아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혜정이는 자신의 삶, 결혼, 그리고 서연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저씨, 이 정원이 제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아세요? 이곳에서 배운 것들이 제 삶을 바꿨어요."
나는 혜정이의 손을 잡았다.
"네가 내 정원의 일부였던 것처럼, 나도 네 삶의 일부가 되어서 기쁘구나."
서연은 정원을 돌아다니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식물들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의 혜정이를 보는 것 같았다.
"서연아, 이리 와볼래? 할아버지가 네게 줄 것이 있단다."
나는 작은 화분에 새로 싹이 튼 식물을 서연에게 건넸다.
"이건 네 엄마가 어렸을 때 심었던 식물의 씨앗에서 자란 거야. 네가 돌봐줄래?"
서연은 눈을 반짝이며 화분을 받았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정원은 단순한 식물들의 집합이 아니라, 세대를 이어주는 이야기의 장소였다. 내가 돌아가더라도, 이 정원의 혜정이와 서연을 통해 계속 이어질 것이다.
석양이 지고, 정원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우리 셋은 나란히 앉아 그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았다. 말없이도 우리 사이에 흐르는 따뜻한 연결고리가 느껴졌다.
"아저씨, 이제 저희는 가봐야 해요. 하지만 다시 올게요, 약속해요."
혜정이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지 이 정원의 문은 너희에게 열려있단다."
그들이 떠난 후, 나는 정원에 홀로 남아 별들이 하나둘 나타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정원의 생명력은 느껴졌고, 내 마음은 평화로웠다.
나의 옥상정원은 내가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한 곳이자,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성장한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은 혜정이와 서연의 이야기가 되어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었다.
정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순간, 나는 어머니의 존재를 느꼈다. 어머니도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셨을 것이다. 사랑과 돌봄의 순환, 그것이 내 옥상정원의 진정한 의미였다.
별이 가득한 하늘 아래, 나는 미소 지었다. 내일도 해는 뜨고, 정원은 계속해서 생명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은 언젠가 또 다른 이의 마음을 치유할 것이다.
나의 옥상정원. 그곳은 단순한 장소가 아닌,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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