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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은은한 사랑

bola-find 2025. 3. 11.


그날, 나는 혜화동 변두리의 조용한 카페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햇살이 카페 유리창을 부드럽게 두드리고 있었다.

스무 살 때 처음 만난 그녀는 서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커피를 한 손으로 들고, 가끔 생각에 잠긴 듯 창밖을 바라보는 버릇이 있었다.

 

"잘 지냈어?" 나는 물었다.

"응.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지. 넌?"

"나도 비슷해."

 

짧고 단순한 대화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묘한 공기가 흘렀다. 예전에도 우리는 이런 식이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같은 향수 냄새를 풍겼고, 손끝으로 컵을 빙글빙글 돌리는 버릇도 여전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몇 년 전 봄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어느 오후, 그녀와 함께 강가를 걸었다. 바람이 불어 벚꽃이 흩날릴 때, 그녀가 문득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사랑을 해도, 결국 이별하게 될까?"

 

그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되었다. 우리는 헤어졌고, 몇 년이 흘러 다시 이렇게 마주하고 있었다.

커피를 다 마신 그녀가 가방을 들었다. "나, 이제 가야 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가자, 따뜻한 봄바람이 카페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문득 깨달았다. 우리는 다시 만나지 않아도, 서로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남아 있을 거라는 것을.

 

그렇게 그녀는 사라졌다. 나는 빈 잔을 바라보았다. 커피 잔에는 그녀가 남긴 자그마한 흔적이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머물렀던 자리. 손끝으로 그 부분을 쓸어보다가 피식 웃음이 났다. 참, 오래도 걸렸구나.

카페를 나섰다. 거리는 어제와 같고, 또 내일과 같을 것이다. 나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걸었던 길이 떠올라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그 방향을 향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골목을 지나 강가로 향했다. 바람이 불자 꽃잎들이 흩날렸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재즈 음악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문득, 그녀와 함께했던 그 봄날이 떠올랐다. 벚꽃을 가만히 올려다보니, 그때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우린 결국, 이별하게 될까?"

 

그때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았다. 우리가 이별했든, 다시 만나든, 결국 사람은 사람의 일부가 된다. 사라져도, 기억이 된다. 기억은 시간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깊이 스며드는 것이니까.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바람이 불어 벚꽃 향기가 스쳤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 봄날의 사랑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조용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10년 후

나는 여전히 혜화동에 살고 있었다.

여전히 커피를 마셨고, 가끔 벚꽃이 피는 계절이 오면 그녀를 떠올렸다. 그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선명해졌고, 때로는 꿈처럼 흐릿하게 남아 있기도 했다.

어느 날, 출장지에서 우연히 익숙한 향수를 맡았다.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서 있었다. 여전히 한 손으로 커피를 들고, 먼 곳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 역시 나를 보았다. 한참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가 미소 지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오랜만이야." 그녀가 말했다. "정말 오랜만이네."

 

우리는 함께 걸었다.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다. 봄바람이 불었고, 벚꽃이 다시 흩날렸다.

그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 "사실, 널 잊지 못했어."

나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도, 늘 네가 떠올랐어. 그러면서도 널 찾아갈 용기는 없었어. 우연이라도 마주치기를 바랐던 것 같아. 이렇게라도 다시 만나게 돼서, 다행이야."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가슴 한구석이 뻐근했다. 우리 사이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감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날 우리는 오래 걸었다.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길 위에서, 우리는 조용한 대화를 나눴다. 서로의 시간, 지나온 이야기, 그리고 다시 마주한 오늘에 대해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흩날렸다. 나는 문득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손을 꼭 맞잡았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사랑은 때로는 멀어졌다가 다시 다가오는 것이라는 걸. 인연이란 그렇게 흘러가면서도, 결국 돌아오는 곳이 있다는 걸.

우리는 한동안 벚꽃 아래 서 있었다. 꽃잎이 흩날리고, 우리는 그 순간을 가만히 음미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그녀의 체온이 내 손끝에 더 가까워졌다. 우리는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아주 오랜만에, 그리고 어쩌면 처음으로, 우리는 진짜로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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