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일뿐, 그것으로 만족해
햇빛이 서서히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창가에 놓인 물컵에 빛이 부서지며 벽에 무지개를 만들었다. 윤서는 그 무지개를 바라보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오늘도 세상은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 없이도.
기억은 언제나 가혹했다. 열아홉 살 겨울, 무용 콩쿠르 전날. 술에 취한 아버지가 그녀의 토슈즈를 잘라버렸을 때부터, 스물다섯 살 여름, 그토록 사랑했던 정현이 "네가 아니어도 괜찮아"라고 말하며 돌아섰을 때까지. 모든 순간이 유리 조각처럼 날카롭게 박혀 있었다.
어머니는 늘 말했다.
"윤서야, 세상에는 네가 되어야 할 사람이 있어."
그 말이 윤서의 어깨를 짓눌렀다. 발레리나가 되어야 했고, 좋은 대학에 가야 했고, 모두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윤서를 갉아먹었다. 밤마다 자신의 부족함을 곱씹으며 우는 날이 많아졌다.
모든 것이 변한 건 그날이었다. 서른둘, 봄이 막 시작될 무렵.
윤서는 회사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왔다. 여섯 번째 실패한 프로젝트. 상사의 따가운 눈초리와 동료들의 숨죽인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한강대교를 건너는데, 문득 멈춰 섰다. 강물이 무심하게 흘러갔다. 그 깊이가 그녀를 불렀다.
그때였다. 옆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줌마, 이거 봐요."
아이였다. 다섯 살 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종이배를 들고 있었다. 의아한 마음에 쪼그려 앉았다.
"이거, 저 혼자 접었어요."
아이의 눈이 자랑스러움으로 빛났다. 종이배는 삐뚤빼뚤했다. 접힌 부분은 울퉁불퉁했고, 한쪽은 살짝 찢어져 있었다. 아이는 그것을 마치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작품인 양 들고 있었다.
"정말 잘 접었네."
"네! 처음엔 잘 안 됐는데, 계속 했더니 됐어요."
아이의 어머니가 다가와 윤서에게 미안한 듯 웃었다. 아이를 데리고 가려는데, 아이가 종이배를 윤서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아줌마 슬퍼 보여요. 이거 가져가요. 제가 접은 거예요. , 이거 접을 수 있어요?."
그 순간, 윤서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일 뿐이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날 이후 윤서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툴렀다. 펜을 든 손이 떨리고, 머릿속 생각을 정리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글쓰기가 그녀의 호흡이 되어갔다.
"오늘도 나는 충분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그녀의 일기는 점차 단순한 기록을 넘어 자신과의 대화가 되었다. 여섯 달이 지났을 때, 윤서는 자신의 변화를 눈치챘다. 더 이상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되었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온라인 글쓰기 커뮤니티에 자신의 일부 글을 익명으로 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나일뿐'이라는 필명으로 올린 글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댓글에는 "내 이야기 같다", "나도 이런 생각을 했었다" 같은 공감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한 독자가 특히 그녀의 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푸른숲' 출판사의 편집자 김지원이었다. 지원은 윤서의 글에 담긴 솔직함과 깊은 성찰에 매료되었다. 그는 댓글을 통해 자신을 소개하고 연락처를 남겼다.
처음에 윤서는 의심스러웠다. 자신 같은 아마추어의 글을 누가 책으로 내려 할까? 일주일을 고민한 끝에 용기를 내어 메일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나는 나일뿐'입니다. 제 글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날, 지원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그는 윤서의 글이 가진 힘에 대해 이야기했다.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용기'에 관한 이야기가 현대인들에게 필요하다고 했다.
그들은 카페에서 만났다. 지원은 윤서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젊고 열정적이었다. 그는 '푸른숲'이 작지만 진정성 있는 작품을 발굴하는 데 집중하는 독립 출판사라고 설명했다.
"지난 글들을 모아서 책으로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물론 추가 글쓰기와 편집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윤서 씨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거예요."
윤서는 망설였다. 자신의 가장 내밀한 생각들이 책으로 나온다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지원의 진심 어린 격려와 자신의 글에 대한 믿음이 그녀를 움직였다.
그렇게 6개월간의 추가 집필과 편집 과정이 시작되었다. 윤서는 자신의 경험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 지원은 때로는 엄격한 독자로, 때로는 따뜻한 조언자로 함께했다. 그들은 주 2회 온라인으로 만나 원고를 검토했다.
특히 어려웠던 것은 아버지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윤서는 그 상처를 글로 표현하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지원은 그녀에게 무리하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윤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히 담고 싶었다.
"이 책이 내 치유의 과정이에요. 아픈 부분까지 모두 담아내고 싶어요."
마침내 원고가 완성되었고, 책 제목은 "나는 나일뿐, 그것으로 충분하다"로 정해졌다. 표지 디자인은 한강의 잔잔한 물결을 배경으로, 작은 종이배 한 척이 떠 있는 모습으로 결정되었다.
책이 인쇄되어 윤서의 손에 처음 쥐어졌을 때,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가장 어두운 시간들, 가장 솔직한 감정들이 이제 하나의 작품이 되어 있었다. 처음으로 윤서는 자신의 가치를 믿을 수 있었다.
책이 출간된 날, 윤서는 오랜만에 어머니를 만났다.
"엄마, 이거 내 책이야."
어머니는 책을 받아들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네가... 이런 이야기를 품고 있었구나."
침묵이 흘렀다.
"미안하다, 윤서야. 엄마는 네가 되었으면 하는 사람만 보았지, 네가 누구인지는 보지 못했어."
윤서는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해가 그들 사이를 흘렀다.
"괜찮아, 엄마. 나도 이제야 알았으니까. 나는 그저 나일 뿐이야.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해."
서른여섯 살 겨울, 윤서는 한강대교를 다시 걸었다. 이번에는 무거운 발걸음이 아니었다. 강물은 여전히 흘러갔고, 그녀도 자신만의 흐름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주머니에는 오래된 종이배가 있었다. 삐뚤빼뚤하고 울퉁불퉁했지만, 그것은 윤서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겨울 하늘은 맑고 투명했다. 마치 그녀의 마음처럼.
"나는 나일 뿐, 그것으로 만족해."
그 말을 중얼거리자, 마치 세상의 모든 짐이 내려앉는 듯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기대에 부응하지 않아도, 그녀는 그녀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멀리서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윤서는 미소 지었다. 이제 그녀는 알았다. 삶은 완벽함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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