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소설4 그 시절 그 여름, 시간은 멈춘 듯했다. 우리가 몰랐던 건, 실제로는 모든 것이 가장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창밖으로 흐르는 뜨거운 공기는 도시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김재형은 낡은 책상 앞에 앉아 이력서를 다시 쳐다보았다. 네 번째 수정본이었다. 아니, 아마도 열 번째일 것이다. 검은색 볼펜으로 수없이 지우고 고치면서 종이는 구겨지고 찢어진 곳곳에 절망이 배어들었다. "또 떨어졌네." 어머니의 목소리가 부엌에서 들려왔다. 신문 지면에 실린 구직 광고를 오려두신 스크랩북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다. 빨간 볼펜으로 이미 십여 개의 지원 기업에 X 표시가 되어 있었다. 취업난은 그의 세대를 옭아매는 쇠사슬 같았다. IMF 외환위기 이후 대학을 졸업한 그의 동기들은 하나같이 불안한 미래와 싸우고 있었다... 5분소설 2025. 3. 28. 더보기 ›› 나는 나일뿐, 그것으로 만족해 햇빛이 서서히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창가에 놓인 물컵에 빛이 부서지며 벽에 무지개를 만들었다. 윤서는 그 무지개를 바라보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오늘도 세상은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 없이도.기억은 언제나 가혹했다. 열아홉 살 겨울, 무용 콩쿠르 전날. 술에 취한 아버지가 그녀의 토슈즈를 잘라버렸을 때부터, 스물다섯 살 여름, 그토록 사랑했던 정현이 "네가 아니어도 괜찮아"라고 말하며 돌아섰을 때까지. 모든 순간이 유리 조각처럼 날카롭게 박혀 있었다.어머니는 늘 말했다."윤서야, 세상에는 네가 되어야 할 사람이 있어."그 말이 윤서의 어깨를 짓눌렀다. 발레리나가 되어야 했고, 좋은 대학에 가야 했고, 모두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윤서를 갉아먹었다. 밤마다 자신의 부족함을 곱씹으며 .. 5분소설 2025. 3. 21. 더보기 ›› 나의 옥상정원 도시의 회색빛 아파트 숲 사이, 나의 작은 옥상정원은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봄이면 수줍게 피어나는 꽃들이, 여름이면 짙은 녹음이,가을이면 붉게 물든 단풍이, 겨울이면 조용히 내리는 눈이 정원을 채웠다. 그곳은 단순한 공간이 아닌, 나의 영혼이 숨 쉬는 곳이었다. 정원을 처음 시작한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였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나에게 친구가 작은 화분 하나를 선물했다."이건 살아있는 것이야.네가 돌봐줘야 해."그 말이 내 마음 깊은 곳에 박혔다. 살아있는 것. 나도 살아있는 것이었다.처음에는 서툴렀다. 물을 너무 많이 주어 뿌리가 썩기도 했고, 햇빛이 필요한 식물을 그늘에 두기도 했다.하지만 실패할 때마다 배웠고, 그 과정에서 나 자신도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옥상정원이 커질수록 나의.. 5분소설 2025. 3. 16. 더보기 ›› 봄날의 은은한 사랑 그날, 나는 혜화동 변두리의 조용한 카페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햇살이 카페 유리창을 부드럽게 두드리고 있었다.스무 살 때 처음 만난 그녀는 서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커피를 한 손으로 들고, 가끔 생각에 잠긴 듯 창밖을 바라보는 버릇이 있었다. "잘 지냈어?" 나는 물었다."응.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지. 넌?""나도 비슷해." 짧고 단순한 대화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묘한 공기가 흘렀다. 예전에도 우리는 이런 식이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그녀는 여전히 같은 향수 냄새를 풍겼고, 손끝으로 컵을 빙글빙글 돌리는 버릇도 여전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몇 년 전 봄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어느 오후, 그녀와 함께 강가를 걸었다.. 5분소설 2025. 3. 11. 더보기 ›› 이전 1 다음